조약돌 이야기

누가 Father요 Mother인가?

                

누가 Father요 Mother인가?

씨앗: 누가 FatherMother인가?
 

 

 지난 번 우리 협회의 행사에 참가하였다. 초창기 개척 멤버들이 모여서 이야기하다보니 초창기의 여러 일들을 나누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 거기서 그럼 “OOO가 Mother일세”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우리 분야의 시조가 누군가 하는 화제였다. 어느 누군가는 언급해야 할 시기가 있어야 하겠기에 여기서 내가 보는 관점을 언급해 보고자 한다.
첫째는 무엇을 기준으로 할 것이냐는 것이다. 나는 제자들과 함께 쓴 언어치료학개론 제1장에 1918년 일제 강점기 시절에 출판된 「조선교육」이란 교육잡지에 소개된 “말더듬 아동을 위한 교사연수회‘의 개최를 알리는 광고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가 현재로서는 가장 오래된 믿을 수 있는 책자에 소개된 기록이다. 누구가 주최가 되어 이 행사를 실시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또 이 기사가 실린 책 이전에도 이런 연수회가 있었는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하였다. 후학들 중에 누군가 「조선교육」이란 책을 더 이전 연도로 추적하여 발견한다면, 더 앞선 역사의 기록을 찾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 교사들을 위한 연수회 외에, 직접 말더듬인들을 위한 치료 광고는 내가 어린 시절에도 동네 담 코너, 전봇대, 시외버스 정류장의 공중변소 등에 “말더듬 7일 완성, 단전호흡, 첫말 막힘 전공‘ 등의 광고를 흔히 볼 수 있었다. 이런 광고는 공식적인 언어치료사가 배출된 후 몇 년간에도 방학이 가까워 오면 신문 하단 반면을 점하는 큰 광고를 흔히 볼 수 있었다. 이런 이들도 이미 그 당시에는 그들 나름 데로 언어장애에 대한 이해와 치료의 필요성을 알고 있었고, 치료를 실천하여 왔다. 이런 분들의 노력도 이 분야의 필요성을 알리고 학문발전의 길에 있을 수 있는 일들이었으므로 우리가 폄하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마 이런 치료 역사는 조선교육에 실린 광고보다 훨씬 더 이전으로 올라갈 수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나는 이런 분들을 ’알 수 없는 분들”이라고 통칭하고, 이들도 언어치료 역사 발전에 공로자들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1980년 4월 미국 유학을 가면서, 우리나라 처음으로 이 분야의 유학생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갔다. EMU 대학에서 교수님들 중 한 분이 “너 김병욱이란 사람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모른다고 하니, 자기와 공부를 같이 한 한국 사람인데, 지금 밀워키 위스컨신대학교에 있으니 연락해 보라고 하셨다. 그래서 김교수님께 연락을 하여 그때부터 알고 지내게 되었다. 김교수님은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을 졸업 후, 1957년에 미국에 와서 Speech Science를 전공하시고 위스컨신대학 언어치료학과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계셨다. 교수님은 미국에서도 이 분야에 권위를 가지고 많이 알려진 학자였다.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의 인재들이 여러 모양으로 양성되고 있었다. 김교수님은 내가 연수회를 실시하고 있을 때 기회되는 데로 모셔서 강의를 부탁하였고, 대구대에는 1학기 동안 초빙교수로 온 적이 있다. 일찍 배운 이 분야를 한국에서 실천하지 못한 섭섭해 하는 마음을 털어 놓은 적이 있다.
1974년경에는 미국의 평화봉사단(Peace Corp) 중에 언어치료사와 청능사가 왔다. 서울 세브란스병원, 대구동산병원, 전주예수병원 3곳에서 정식으로 전공하여 자격증이 있는 외국인이 실시한 언어치료 실제라는 점에서 뜻 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때 보조자로 한국인들이 돕게 되었는데, 이들이 한국인으로서는 언어치료 임상에서 개척의 일원들로 역할을 하였다.
학문적으로는 대구대학교를 빼놓을 수 없다. 내가 1970년 대구대학교에 입학할 당시의 특수교육과는 학부과정에서 4개 전공영역(정신지체, 청각, 맹, 지체부자유)으로 나누어져 있어서 각 영역별로 전공자를 양성하였다. 청각장애 영역은 청각장애교육과 청능훈련으로 교수님들의 담당영역이 정해져 있었다. 청능훈련은 이규식교수님이 담당하셨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청각학 분야의 개척자이었다. 이미 이때에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청능검사와 보청기 착용, 청각장애 아동들의 언어치료 등을 위한 크리닉이 있었다. 평화봉사단(Peace Corp) 보다는 훨씬 먼저다. 대구에 있던 봉사단원들이 우리 대학을 방문했고, 나도 이 때 이들을 알게 되어 교제를 나누게 되었고, 도움을 얻게 되었다.
1973년에 대구대학교에 대학원이 생겨서 1회 생이 입학하였다. 나는 2회 생이 되었다. 대학원에서는 청각장애교육전공이었으나, 1982년부터 청각.언어 장애 전공으로 변경되어 언어장애 영역을 포함시켜서 폭이 넓어졌다.
1989년 대구대학교 사범대학에 치료특수교육과가 시작되었는데, 이 학과는 물리치료, 심리치료, 언어치료 등을 담당할 교사들을 특수학교에 배치하는 것을 목표로 개설되었다. 언어치료 분야가 특수학교에 교사로서 배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초창기에는 우리 학과의 학생들 중 30%(12명)가 치료교사 자격증을 받아 특수학교와 특수학급의 교사로서 배치되었다. 그러나 2007년에 갑자기 치료특수교육과가 없어지게 되고, 특수교육의 전공영역도 구분없이 통합되는 조처가 있었다.
특수교육의 한 모퉁이에 머물던 언어치료학이 정식으로 하나의 학과로 발전한 것은 1988년이다. 대구대학교 재활과학대학이 1987년 교육부로부터 인가를 받고, 1988년에 처음 신입생을 받은 것이다. 재활과학대학은 이규식교수님을 중심으로 개설 되었는데, 직업재활학과, 언어치료학과, 재활삼리학과, 물리치료학과 등의 4개 학과로 시작되었다.
위에서 언어치료의 필요성이 ‘알 수 없는 분들’에서 부터 면면히 이어왔다. 대학의 정식 학과를 탄생시키고, 학문적 발전의 계기를 만든 분이 이규식 교수님이다. 학문을 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분을 우리 분야의 Father라고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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