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약돌 이야기

아내동행에 대한 번민

 

내가 봤는데: 유학 1- 아내동행에 대한 번민

유학 1: 아내동행에 대한 번민
 
나는 31세인 1979년 11월 10일에 결혼하였다. 이렇다 할 경제적 준비나 직장이나 공부를 마친 상태도 아니었고, 선을 보라는 청이 있어도 선뜩 용기를 내어 결혼하겠다고 할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아내와의 첫 선을 보는 자리에서 “5년만 고생하면 괜찮아 질 것 같은데, 그 기간을 참아줄 수 있느냐?”고 물은 것이 나의 첫 대화였다. 이렇게 해서 그 당시에는 노총각 신세를 면하고 결혼하게 되었고, 단칸 셋방으로 신혼생활을 시작하였다.
결혼 후 6개월 만에 유학을 가게 되는데, 임신한 아내를 데리고 가느냐 혼자 가느냐로 고민하게 되었다. 나 혼자 갈 수 있는 유학 경비도 없었기 때문에 고생은 불 보듯 훤한 일이었다. 유학길은 고생을 각오하고 가야 하는 길이어서 나 혼자 고생하면 되지, 아내를 함께 데리고 간다는 생각은 어느 모로 보나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하루 저녁은 ‘당신을 데리고 가겠소’라고 말하고는 그 다음 저녁에는 ‘시골에 가서 부모님과 5년만 고생해 주오’라는 번민의 날들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번민의 날들이 계속되는 중에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었다. ‘결혼이란 아내와 함께 있는 것이 기본인데 노총각 장가가게 했으면 함께 있으라는 뜻이고, 유학의 길을 열어주셨으면 유학을 가라는 것이 아니가? 나에게 부족한 것은 단지 돈뿐인데 하나님은 세상에서 제일 부자가 아닌가? 그를 내가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으니 내가 부자 아들이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되니 모든 번민은 사라지고, 아내에게 ‘당신을 데려 가겠소’하고는 그 후에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유학을 가자면 미국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아야 하는데, 그 당시에는 통행금지시간도 있었고, 비자 받을 사람도 너무 많고 해서 대사관 근처에 있는 여관에 머물다가 4시 통행금지 해제 사이렌이 울리면 근처에 묵던 사람들이 쏜살같이 나와 줄을 서서 9시 대사관 문 열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내가 갖추어야 할 서류 중에 미비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것은 은행잔고확인서였는데, 150만원으로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액수였다. 이것이 마음에 걸려서 비자를 주지 않으면 어쩌나 조마조마하게 기다리는데, 나와 아내의 이름을 부르면서 비자면접을 받지 않아도 되니 오후 3시에 와서 비자를 찾아가라는 방송이 나왔다. 어찌나 기쁜지 나도 모르게 큰소리로 “야—!”하고 만세를 불렀다.
우리나라 최초로 언어치료 공부를 하기 위한 학생으로서 1980년 4월 25일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막상 유학을 가니 나 혼자 온 것보다는 아내를 데리고 온 것이 여러모로 좋았다. 

 

 

이전글다음글 목록